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(문단 편집) === 켈트족과의 전쟁 === 기원전 223년, [[집정관]] [[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]]와 푸블리우스 푸리우스 필루스가 원로원의 지시에 불복종하여 행동한 일로 강한 압박을 받고 예정보다 일찍 사임했다. 이후 [[인터렉스]]의 지명에 따라 마르켈루스가 기원전 222년도 집정관에 선임되었고, 마르켈루스는 동료 집정관으로 [[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]]를 선택했다. 이 무렵, [[켈트족]]의 분파인 인수브레스 족이 플라미니우스와 필루스를 상대로 참패를 당한 뒤 로마에 사절을 보내 평화 협정을 맺자고 요청했다. 그러나 마르켈루스와 칼부스는 민회에 전쟁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해 동의를 얻어낸 뒤 군대를 이끌고 북상했다. 인수브레스 족은 이에 대응해 가에사타이 족 30,000명을 끌어들였다. 두 집정관은 포 강을 넘어 인수브레스족의 영역을 침공해 아케라를 포위했다. 이때 가에사타이 장병들이 포 강을 건너 클리스티다움(오늘날 카스테지오)를 위협하자, 두 사람은 군대를 나누기로 했다. 칼부스는 대다수의 병력을 이끌고 아케라 포위를 계속하기로 했고, 마르켈루스는 전체 기병의 2/3와 경무장한 병사들을 이끌고 포 강을 건너 클리스티다움으로 향했다. 이때 가에사타이 족이 돌연 나타나 공격해오자, 마르켈루스는 전투 대열을 길게 펼쳐서 조기에 포위되지 않게 한 뒤 몸소 기병대를 이끌고 적군의 측면을 공격했다. 한창 전투가 진행되던 중, 가에사타이 족의 왕 비리도마투스와 마르켈루스가 서로 맞닥뜨려 [[단기접전]]를 벌였다. 그 결과 마르켈루스가 승리하고 비리도마투스의 흉갑을 탈취했다. 지도자가 전사하자 전의를 급격히 상실한 가에사타이 족은 포 강으로 도주하다가 로마군의 추격을 받고 대거 전사했다. 한편, 칼부스는 아케라 공략에 성공한 뒤 인수브레스 족의 수도인 메디올라눔(오늘날 [[밀라노]])를 향해 진격했다. [[폴리비오스]]에 따르면, 메디올라눔 공략은 전적으로 칼부스의 공적이라고 한다. 반면 플루타르코스, [[에우트로피우스]], [[요안니스 조나라스]]에 따르면, 두 집정관이 합심하여 메디올라눔을 공략했다고 한다. 이후 인수브레스 족이 완전히 항복하자, 두 집정관은 로마로 돌아와 개선식을 거행했다. 이때 마르켈루스는 [[유피테르]] 신전에 비리도마투스의 흉갑을 바치는 [[스폴리아 오피마]]를 행했다. 이는 로마의 건국자 [[로물루스]],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코수스 이래 세번째였다. 앞선 두 사례가 전설처럼 여겨지는 만큼 역사적인 유일한 사례였다.[* 후대의 [[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]]의 손자인 [[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(기원전 30년 집정관)|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]]가 바스테르나이족의 왕 델도(Deldo)를 일대일 결투에서 죽여 이 영예를 받을 자격이 있었으나 당시 로마의 지배자였던 [[옥타비아누스]]가 허락하지 않았다.] 마르켈루스는 이와 더불어 비르투스와 호노스 신을 위한 신전을 건설하겠다고 맹세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